현대시의 거장 미당 서정주문학관을 다녀와서

2021. 2. 23. 18:50블로그소개/이영섭편집장 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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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광주에서 멀지 않은 전라북도 고창군에 서정주 문학관이 있다.

서정주 시인의 시는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서 처음 접했었고, 국어 선생님이 느릿느릿한 걸음을 걸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국화 옆에서 시를 낭송할 때 아름다운 시어에 매료당했던 추억이 있어 평소 가보고 싶은 문학관이기도 했다.

고교시절 시인의 여동생은 나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셨고,, 시인의 유명세로 그분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남편이 늘 중고차만 타다가 생애 처음 새 차를 사서 드라이브를 할 겸2021년 2월 고창에 있는 서정주 문학관을 가게 되었다.

한적한 시골마을 너른 들녘에 평화로운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앞 쪽으로 폐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문학관은 너무 아담하고 소박해 보였다.

그분의 생애에 대한 설명과 흉상, 많은 사진, 그의 육필원고, 시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국화옆에서, 자화상, 푸르른 날, 입춘 가까운 날, 애기의 꿈, 귀촉도, 동천 등 시들도

소개되어 있었고, 재현해 놓은 선생님의 집필실, 그분의 유품들이 나름 짜임새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에 읽던 성경책, 치매가 오지 않도록 쓰고 외웠다는 전 세계 산의 이름과 높이가 적혀있는 영어 육필 노트, 아내인 방옥숙 여사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던 노트들도 볼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결혼사진, 무엇보다 많이 전시된 선생님과 선생님 아내의 사진 속 미소에서 ‘‘두 분은 참 금슬이 좋았나 보다’를 유추할 수 있게 했다.

푸르른 날이란 시는 가수 송창식 님이 노래로 불러 유명한 시인데 나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이 노래를 가끔 부르곤 했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노랫말엔 사무치는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지고 가슴이 저리곤 했었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시인은 천여 편의 시를 남겼고, 그의 시는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5번이나 추천되기도 했다고 한다.

천재적인 문학인이요, 시인인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도록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1915년에 태어나서 2000년에 사망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최악의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났기에 시인의 삶 또한 비극이었고, 살기 위해서 때론 비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그를 이해하고자 했지만 85년 생애 모두가 청아하고 아름다운 시와는 너무 배치되는 것이었다.

반민족 행위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미당은, 일제 강점기에 사쓰 시로 시즈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을 했고 글을 통한 일제 찬양과 우리 민족에게 일제에 동조하라는 선동을 했는데 그것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한 신문사에서 미당을 인터뷰를 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친일 시를 쓴 것이고, 독립이 수백 년 후에 이루어질 줄 알고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 행위만이 아니라, 해방이 되어서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사 독재 정권에, 정당성을 찬양하며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로 살아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전두환 생일 때 그가 바친 헌시를 몇 년 전 읽게 되었을 때 그의 시를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살기 위해 그렇다 해도, 민주주의 시대에서까지 세상을 선도할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불의와 기득권에 빌붙었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2000년 12월 그의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신문사 기자가 서정주 시인에게 그간의 행적에 대해 반성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서정주 시인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잘 좀 봐주시게”라고” 말했다.

그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나는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확실하게 반성하지 못하는 그가 슬펐다.

‘그의 시 자화상의 구절이 그가 하고자 한 못한 말을 대신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름다운 피 끓는 정의에 불타는 청년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문학관이 그의 사후인 2001년 11월 3일 개관을 했는데, 그 이유는 미당이 중앙 고등 보통학교 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를 주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날이 11월 3일이라고 한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났고, 1930년 2주년 기념 광주학생운동을 미당은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을 당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 후년에는 고창 고등 보통학교에 편입했지만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자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퇴학, 자퇴, 강제징용, 죽음에의 공포...

그 시절을 살았던 시인을 이해하고 싶어 진다..

어느 한 시절이나마 퇴학과 자퇴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싸웠던 청년 미당 만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행적이 미워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아름다운 그가 남긴 수많은 시어들...

그러기에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의 사후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었나 보다.

교과서에 미당 시가 실리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현대시의 거장이었던 그의 작품은 지금도 건재하고 암송되고 있는 것 같다.

 

문학관이 있는 마을은 가을이 되면

소쩍새의 울음도

천둥도

먹구름도

무서리도

잠이 오지 않는 밤도 인내한

국화꽃이 아름답게 만발한다고 한다.

 

국화꽃이 아름다운 가을, 다시금 그곳에 가서 한때나마 순수했던 청년 미당과 마주하고 싶다.

그의 굴곡 많은 삶이 가슴 아파서-

그에게 쏟아졌던 비난의 화살이 그리고 아프지 않았을까

그가 보냈을 잠이 오지 않았을 수많은 밤이 애잖해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한 시인에게서 진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마지막 그가 남긴 “잘 좀 봐주시게”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시어처럼 나의 허물들을 용서해 달라는 반성의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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