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자락의 충장사와 광주의 대표 거리인 충장로의 유래

2020. 5. 24. 21:22블로그소개/이영섭편집장 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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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은 광주시내에 위치 해 있어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러 자주 가는 산이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 녹음 우거진 여름,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눈 내리는 하얀 겨울, 사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무등산은 광주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산이다.

무등산은 광주시내에 위치 북쪽에서 바라본 무등산
무등산은 광주시내에 위치 해 있어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러 자주 가는 산
녹음이 우거진 5월의 무등산

녹음이 우거진 5월의 무등산은 싱그럽다. 그 녹음 속으로 남편 아들과 함께 초록빛 길을 따라 드라이브에 나섰고 늘 차로 그냥 지나쳤던 무등산 자락에 있는 충장사를 맘먹고 관람하기로 했다.

충장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시다 돌아가신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사당으로, 고즈넉한 사당에 들어서서 충장사를 보니 다른 곳과 다르게 모든 문들이 하얀색이었다.

무등산 자락에 있는 충장사를 맘먹고 관람


잘 정돈된 뜨락을 지나 사당 앞에 가서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는데 문화 해설사 분이 계셨고, 나는 그분에게 이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문이 하얀색인 것은 제사를 위하여 조상의 신주를 봉안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덕영 장군은 1567년에 광주 충효리 석지촌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감히 싸우셨다고 한다.

잘 정돈된 뜨락을 지나 사당 앞에 가서 방명록에 사인
충장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시다 돌아가신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사당
광주의 대표 거리인 충장로도 그분의 호를 따서 지어진 것

의병장이 되어서는 곽재우와 권율 장군 밑에서 영남 서부지역을 방어하기도 했고, 이순신 장군과 수륙 합동작전을 펴기도 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순신, 권율 장군과 동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지셨던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충장사가 무척 의미 있는 곳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몽학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권율의 명으로 진압을 하러 출병했지만, 김덕령은 이몽학과 내통한 무리로 반란군에 가담했던 이들에게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심문을 받던 중 옥중에서 장독으로 1596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역모 가담자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문이 하얀색인 것은 제사를 위하여 조상의 신주를 봉안한 건축물이기 때문(문화 해설사 답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순신,  권율 장군과  동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지셨던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충장사가 무척  의미 있는  곳


현종 임금 때인 1661년에야 역적의 누명을 벗고 관직에 복원되었다고 하니 그가 죽고 65년 만이니 그동안 그 가족과 가문이 받았을 고초는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김덕령 장군은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 역모를 꽤 했을 시 삼족을 멸하지 않았던가

그의 김 씨 집성촌이 있는 지금의 충효동에는 그분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지고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살아가는 이름도 아름다운 충효동 사람들이 있는 곳, 김덕령 그분이 태어나고 자랐던 그곳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1788년 정조 임금께서는 그에게 의정부 좌찬성의 직함을 주시고 시호를 내리셨는데 그것이 충장이었고, 그래서 이곳이 충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대표 거리인 충장로도 그분의 호를 따서 지어진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충장로는 의병장 김덕령의 길이었던 것이다. 문화해설사 분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 알고 보는 충장사는 참 의미 있는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글쓴이 : 녹색주택 편집장 이 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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