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태화강의 추억을 더듬어

2010. 9. 17. 06:25여행/남부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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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40여 년 전 지질이도 가난한 시절 절라도에서
경상도로 직업이 목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나라
산업화시대의 시작점에서 어려서 부터 보고자라 왔습
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는 몇번을 옮겨 다녀야 했지요.
오늘은 울산이 공업화도시가 되는 과정에 울산시
삼산면 이라는 곳에서 거의 2년을 살면서 40여년
전 기억을 되살려 그 당시 어린이의 눈으로 본
풍경과 장년이 되어 2년전 경부고속철도공사관계로
울산에서 가까운 언양에 거주하면서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도시화 된 울산에서 살았던 추억과
모습을 더듬어 봅니다. 
저의 블로그를 자주 오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에게 저의 개인적인 삶도 알려 드려야 
제가 자주드리는 글들이 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표현이
부족하지만 올려드림니다.

2년 전 경부고속철도공사현장이 쉬는 날 40여 년 전의 추억이 담긴 어릴적 2년을 살면서
초등학교 1,2학년을 다녔던 그 당시 삼산면이라는 곳을 방문하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지금처럼 블로그를 할 것 같았으면 사진에 담아 놓아 소개해 드렸으면 좋았겠습니다.
10년 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였는데 4번이나 바뀌였으니 그 당시 살았던 시골집은 흔적도
없이 살아져버려 찾는다는 것이 바보 스러워 보였습니다. 
지금도 어느 초라한 시골지역도 개발의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살아져 버리는 옛것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잠시 사진소개  3년전 고속철도현장으로 가기전 공사장현장에서 찍은 제가 다니던 모 대기업회사장비 입니다.
(65톤 초대형장비) 캐터필라245. 일반 굴삭기의 3배의 크기입니다.하루에 연료(경유)를 보통 500리터(2드럼반)을 
사용하는 미국산 장비이며 운반 할 적에는 버킷을 따로 분리하여 운반하고 조립합니다. 엔진 수리비만 3천 만원듭니다.
왠만한 암석은 잡아 떼어내어 높이들어 내리쳐 깨뜨립니다.산업화 초창기에는 장비기사가 사무직보다 보수가 좋았답니다.어느 시점부터인가 역전을 하더니 지금은 다들 어려운 일이라 배우려고 안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장비로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적이 종종 있었답니다.
이 장비는 이해를 돕기위해 예를 들자면 인력으로 사람이 500명이 한꺼번에 해도 못할 만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장비기사가 500여명의 일꾼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얼마나 대단합니까.그러한 재능들을 무시를 하거나 없신여겨 기능이 좋은 분들이 떠나는 안타까운 일들도 현장에서 종종 있답니다.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을 그래서 저는 존중을 합니다.
기능이 부족하면 일을 잘못하여 도리어 안 한것만 못하게 되거나 2~3억이 넘는 고가의 장비가 망가지면 큰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능이 좋은 분들을 우대를 해주어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사무실직원과 동등한 기능적 대우도 해주면 일하시는 분들이나 배우는 분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것이라고 직접 현장에서 30여 년을 체험한 이야기 였습니다. 


그 당시 태화강을 끼고 들판가운데 제법 큰 마을이 있었지요.각지에서 몰려드는 지금의 모 정유회사공사공사장의 관계자들이 주거지가 부족한 곳으로 갑자기 몰려들자 집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기거하는 풍경도 보았지요.
다행히 저의 가족은 허름한 헛간으로 씀 직한 방하나를 얻어 살게 되였습니다.
집주인 아저씨는 제법 좋은 집을 소유하고 계셨는데 가을이면 태화강에 경상도에서는 꼬시레기라 부르고 절라도에서는 문조리라 불리우는 입이 큰 고기를 낚시로 잡아 숭숭 썰어 초장에 찍어 먹던 어린시절이
너무나 좋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보니 유달리 그래서 회음식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네요.

마을에서 기르는 소들은 공동으로 태화강 둑으로 몰고가 풀을 먹이거나 강하류에 
갈대가 우거져 있는 모래톱으로 형성 된 섬처럼 생긴 곳으로 소떼를 몰고가 풀을 먹이곤 
했습니다.강을 건널 때 어떤 청년은 소등에 올라 타거나 꼬리를 잡고 가거나 헤엄을 쳐서
건너 하루종일 소들과 지내다 해질녁에 돌아오곤 했지요.
모래톱으로 형성 된 그리크지 않은 섬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살아져 버리고 강 둑은
사람도 얼신 못하는 자동차만 다니는 강 하류지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지역의 특성상 눈을 볼 수 없었고 강 하류 지역이라 들판을 가로 질러 보기드문
큰 수로가 형성되어 추운 겨울에는 얼음이 얼면 발에 신는 스케이팅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겨울철에는 땔감이 부족하여 20여리가 되는 곳에서 연탄을 조금씩 가져다 쓰는 것도
보았고 나무를 하러 강 건너 지금 종합운동장이 있는 곳으로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바닷가 인접지역이라 지하수는 물이 좋지 않아 지금 처럼 수도시설이 없어 돗질이라는 낮으 막한
산으로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산밑에는 자연샘물이 솟아나 먼 곳에서 물을 길러 먹던 추운 겨울이
생각이나 그 곳을 둘러 보았는데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시설물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았던 그 곳은 울산지역을 자세하게는 잘 알지 못하지만 현재 울산의 번화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큰 길과 높은 빌딩, 아파트지역으로 변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숙소로 돌아왔답니다.

모 공사장현장의 제가 기거하던 숙소(고속철도 가기 전 공사현장)

그 지역에 살면서도 초등학교를 20여리나
떨어진 시내권으로 다니면서 힘들었던 일과
어느날 아버지의 월급을 어머니께서 저의
책가방에 넣어 두신 것을 모르고 학교에 갔다
10여리를 급하게 달려오신 어머님께서 돈을
가져가신 일이 생각이나며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일은 1살먹은 여동생을 잃고
돗질산에 묻고 돌아오신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금 자식을 둔 부모가 되어
되돌아 보니 힘든 세월을 사셨음을 느끼게 합니다.  
많이 잊어 지셨겠지만 오늘 다시 생각하니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 

요즘은 태화강 주변도 생태도시로 만들어져 모범적인 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40여 전 그곳에 살면서 그 지역분들과 우리지역분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고 숨쉬고 사는 하나도 틀리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저는 40여년 전에
느끼고 체험하고 살았던 사람으로 제발 지역,지역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고속철도가 생겨 한 두시간이면 다 갈수 있으니 눈을 돌려 세계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블로그에는 독일에서 미국에서 캐나다에서 실시간으로 이웃집 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지낼 수있는 시대에 우물안 개구리 보다 못한 가마솥에 감자같은 소리는 
그 만좀 했으면 합니다.
40여 년 전 알고 지내던 분들은 지금은 찾을 수 없고 만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좋았던 집주인 아저씨! 꼬시레기 낚시질 하러 가자고 저의 이름 크게 부르던 모습이
추억으로 남습니다.

울산에서 2년 살다 여수 그 당시 호남정유공장짓는 곳으로 이사하여 또 2년여를
살았습니다. 그곳은 멀지 않은 곳 이기 때문에 차후에 방문하여 사진에 담아와서
올리겠습니다  


가마솥에 감자같은 소리 제가 글을 쓰면서 생각한 문장입니다.
   솥에서 잘 익어 먹어 주기만 기다리는 피동적인 존재로 표현하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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